부산 - 금정산 동문/고당봉 산행 (2015년 9월 13일)
*날짜 : 2015년 9월 13일
*장소 : 부산 금정산
*코스 : 온천장역(12:14) - 동문(12:47) - 4망루(14:37) - 원효봉(14:55) - 북문(15:09) - 고당봉(15:40) - 금샘(15:57) - 북문(16:35) - 범어사(16:55)
*동반자 : 별키드, 너울님
*촬영기기 : 삼성 갤럭시 에스4(휴대폰), 캐논 550D(DSLR/18-55mm 렌즈)
*금정산성
: 최대의 산성, 금정산성(金井山城)으로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정산성. 백두대간의 꼬리 끝자락에 해당하는 부산 금정산에는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고찰 범어사가 있을 뿐 아니라 삼국시대에 축조된 금정산성이 있다. 동래온천장 서북쪽 금정산(801.5m) 정상에 위치한 금정산성은 동래부 및 양산, 기장의 피난겸 항전성으로 전장 17,337m, 높이 1.5∼3m, 면적 약 8,213㎢에 이르는 산성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위치 및 규모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산성은 숙종 29년(1703년)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 후 일본의 재침입에 대비하여 경상감사 조태동이 돌로 쌓기 시작하여 숙종 33년(1707년)에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수축하였다. 그리고 순조 8년(1808년) 동래부사 오한원이 중수하였으며, 순조 24년(1824년)에는 동래부사 이규현이 이곳에 별장을 배치하였다. 평상시에는 성내의 해월사, 국청사에 있는 승려들이 성벽의 보수유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1970년에 4 개 성문 중 동 ·서 ·남문이 복원되었다.
일제 암흑기에는 일인들에 의해 훼손, 황폐화되었던 것을 1971년 국가 지정 사적으로 지정하여 2년에 걸쳐 동,서,남문을 복원한 이후 현재 꾸준히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문루 4개소(동, 서, 남, 북), 망루 4개소(1,2,3,4망루)가 소재해 있으며, 또한 금강공원에서 금정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와 수련원, 산장 등의 시설이 있다. 연중 내내 많은 등산객과 행락객들, 학생 및 산악인들이 자연휴식처로 찾아들고 있으며 거기에 따른 인위적 파괴가 증대되고 있고, 폭풍우 등의 자연적 발생 등으로 금정산성 훼손이 심화되어 매년 계속적으로 보수하고 있으나, 유지관리가 더욱 더 필요한 실정이다. 산성길이 : 17,377m / 성벽높이 : 1.5m~3m,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2,000평(약 8.213k㎡) 가량.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금정산
: 호국의 산, 금정산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산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호국사찰(범어사)과 국내최대의 금정산성이 축성되어 있다. 금정산은 해발 801.5m의 주봉인 고당봉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m)과 남으로 상계봉(638m)을 거쳐 성지곡 뒷산인 백양산(642m)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대륙봉, 파류봉, 동제봉 등의 준봉을 일구어 놓고 있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으나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마다 맑은 물이 항상 샘솟고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하여 기암절벽이 절묘하여 부산이 자랑하는 명산이 되었다. 북쪽으로 산정으로부터 남쪽으로 ㄷ자형을 이루는 금정산성(金井山城:사적 215)이 있는데, 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한국 옛 산성 중 규모가 웅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금정산에는 약수터가 14군데나 있어 등산객의 목을 축여주고 일부 구민의 식수로 쓰여지고 있으며 2,300여종류의 나무와 날짐승, 길짐승을 포함 600여 마리의 동물이 서식하는 동, 식물의 낙원이자 동래온천, 금강공원, 범어사, 국청사, 금정산성과 산성마을 등 명소를 두루 지니고 있다.
금정산 이름의 유래는 '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에 기록된 전설에 의하면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 가량이고 물이 늘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금빛이 있으므로 금색어가 다섯색깔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금정산이라고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것이 바로 금정산의 유래가 되었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금샘
: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 쪽으로 300 여m쯤 오르다보면 고당샘이 나오고, 이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100여m쯤 내려가면 바위군 맨 끝에 우뚝 솟은 바위 정수리에 언제나 금빛 물이 고여 있다는 금샘이 있다. 금샘의 유래에 대해서는 1432년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동래현조>와 1481년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동래현」<산천조>에 기록되어 있다.금샘 주위에는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낮에 햇빛의 열기로 데워지고, 데워진 바위가 밤이 되면 주변 수분을 빨아들이는 작용으로 샘물이 차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10월의 해 질 무렵에 금샘을 보면 물 안에 물고기 형상의 홈이 파여 있어 석양과 단풍빛이 반사되어 금빛 물로 변화하고, 바람에 파장이 일렁이면 마치 금빛 물고기가 헤엄치며 노니는 것 같이 보인다.
금샘은 샘 둘레의 곡선미, 물결의 금빛 파장과 함께 사방이 확 트인 아름답고 장엄한 풍광을 가진 곳이며, 부산의 진산이자 제일 명산인 금정산의 이름이자 범어사 창건 설화와 절 이름의 탄생 배경을 간직하고 있는 명소로,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채 신비한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담아 왔다 지금도 범어사에는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백악기 말인 8천만 년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체가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과정과 기후변화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금샘은 그 자체로서도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주변에 널리 분포하는 토르와 암괴류가 이 일대에 자생하는 등나무군락지 등과 조화를 이루며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경관적 가치도 매우 뛰어난 곳이다. (출처 : 문화재청)
*금정산성 4대 성문
1) 아치형의 동문(東門)
: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00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문은 금정산성을 굳게 지키는 역할 못지 않게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다.
'정묘년(순조 7년, 1807년) 추계(秋季)에 이르러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기둥과 들보를 백 리 밖에서 운반하고, 벼랑에서 낭떠러지를 깎아내는데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萬) 사람이 힘을 일제히 쓰니 149일만에 서, 남, 북문의 초루(성문 위의 누각)가 완성되었다.'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금정산성 증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설비문의 일부이다. 그 자신이 글을 짓고 썼다고 하니, 이것이 동문을 다시 세운 공식 기록인 셈이다.
동문은 동래읍성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한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동문은 1807년 음력 10월에 준공한 것이 된다. 특히 동문과 성첩(城堞)은 동래읍민이 일을 맡았고, 나머지 서, 남, 북문과 성곽은 경상감영의 71개 주(州)에서 차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이룩했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은 지금으로부터 188년 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세운 그 모습이 물론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던 이 성과 성문, 군관아시설이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되어 크게 훼손된 것이다.
2) 계곡에 세운 서문(西門)
: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진 것이 서문(西門)이다. 낙동강에서 대천(大川)을 따라 금정산성마을로 오르면 마을 입구에 이 문이 자리하고 있다. 계곡에 세운 성문답게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금정산성 동문과 서문은 사제지간인 스승과 제자가 경쟁적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동문을 스승이, 서문을 제자가 동시에 조성했다. 그 결과 제자의 실력이 스승을 능가했다는 것이 당시 주민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고 한다.
실제 서문은 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꼴로 돌출한 성곽의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다. 또한 서문 바로 옆으로 흘러내리는 대천(일명 화명천)에는 세 개의 아치를 이룬 수문(水門)을 크고 묵직한 돌을 쌓아 만들어 두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그 위로 성곽이 통과하게끔 해 놓았다. 좌우편에 험준한 지형의 산이 솟아있어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현들의 지혜를 이곳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서문이 위치한 곳은 금정산성 성곽 1만7,337m 가운데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지점이다. 그러나 이 서문 좌측은 지형이 험준하여 등산로도 없는 석문(石門) 능선이며, 바른편은 역시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파류봉과 연결되는 능선이다.
서문은 그 해발고도가 낮지만, 계곡을 끼고 적을 방어하기 아주 용이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산성마을 죽전 부락 맨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거리이다. 화명동의 낙동강 쪽에서 보면 금정산성마을의 관문이기도 하다.
금정산성 전체의 방위 개념으로 보면 이곳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구로 침입한 왜적들은 화명동에서 대천을 따라 이곳으로 공격로를 열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왜적들은 바다에서 바로 상륙하기도 하였지만, 다대포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구포에서 만덕동으로 몰려오거나, 화명동에서 대천의 계곡을 따라 오르기도 하였다.
3) 소박한 모습의 남문(南門)
: 금정산성 서문(西門)에서 대천(大川)의 상류를 끝까지 따라 오르면 남문(南門)에 닿게 된다. 이 남문은 동제봉(東帝峰)과 상계봉(上鷄峰)을 잇는 능선상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해 있다. 남문에서는 북쪽으로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바로 건너다 보인다. 백양산과 남문 사이는 만덕고개와 만덕동이 자리한다. 지난날에는 유명한 만덕사(萬德寺)가 남문 남쪽방향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문은 동문과 2.5km, 북문과 6.5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이 남문에는 산성고개에서 도로가 이어져 있으며, 금정산 유일의 케이블카 종점과 600m 남짓한 거리여서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등산로도 만덕동과 상계봉 등에서 사통팔달로 열려 있다. 남문은 그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돋보인다. 언뜻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남문은 동문이나 서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라(新羅)의 축조 기법이 깃들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현존 금정산성은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축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동래부지' 등의 공식 기록이지만, 신라의 기법이란 이야기가 왜 등장하는가에 대한 연유는 한번 눈 여겨 볼만하다. 부산부사(釜山府史)'라는 일본어로 쓰여진 초고 제1권에 금정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금정산성이 원래 신라시대로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를 세밀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의 4대문 가운데 동, 서, 양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완연하나 남, 북 양 문의 결구(結構)는 개수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의 내외에 둔병(屯兵)의 사타의 양식이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인 반원형 층 단으로 세 겹, 다섯 겹으로 되었다.'
이 사실을 지적한 '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는 그러한 '정확한 사타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불명하기 때문에' 금정산성의 신라 축성설 제창의 특유기법을 지금의 남, 북 양 문에서 찾기란 쉽지가 않다고 하였다. 전문 학자들도 불명이라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더욱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4) 투박하고 거친 북문(北門)
: 금정산성 북문(北門)은 범어사에서 서쪽으로 1.6km,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의 남쪽 0.9km 지점에 있다.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려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직사각형의 석문에 누각과 성곽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세운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금정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금정산성은 임진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 부민들이 난리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피란겸 항전성이다. 임진란에 있어서 동래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고을에 비할 수 없이 중요했다. 나라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난리의 발생과 함께 적의 첫 상륙지점으로 제일 먼저 전화(戰禍)를 나누고 굳센 항전을 전개한 곳이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 난리의 장기화에 따라 적의 교두보로서 오랜 수난이 계속된 곳이기도 하다.'(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
이런 상황에서 축성한 금정산성의 성문이라면 미적(美的) 감각을 동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음이 오히려 당연하다. 투박하고 거칠며 모양새가 없는 북문에서 금정산성의 실체를 아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북문은 복원 작업도 다른 성문들에 밀려 부산시가 가장 뒤늦게 하였다. (출처 : 한문화재 한지킴이)
***
PC로 사진을 볼 경우 [F11]를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
***
.
.
.
파란 하늘 아래~ 금정산성 길을 걸으며...
가을빛을 준비하는 푸른 잎들과 인사해본 날~!! ^@^
2015년 우리 부부 35번째 여행은
부산 금정산 동문/고당봉 산행 였습니다~* ^^